1992년 10월 25일은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의미 있는 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지금이야 중국발 미세먼지로 "숨 쉬기조차 어렵다"며 온 국민이 난리를 치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공기가 나빠서 숨을 못 쉰다는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물을 사 먹는다는 개념조차 희미할 때였다.88서울올림픽이 열린 지 꼭 4년, 한국도 남 보란 듯이 잘살 수 있다며 전 국민이 열정에 가득 찰 때였다. 분배보다는 성장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고 취직난이란 찾아볼 수 없었던 호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지금봐서는 뜬금없는 `환경보호 콘서트`가 열렸다. `한국판 위 아 더 월드`라 보면 된다. 행사 이름은 `내일은 늦으리`.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발상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당대 내로라하는 슈퍼스타가 모두 참여한 엄청난 라인업이었다. 타이틀곡은 `더 늦기 전에`. 참여한 가수는 서태지와 아이들, 넥스트(N.EX.T), 이덕진, 윤상, 신성우, 김종서, 봄여름가을겨울, 이승환, 신승훈, 푸른하늘, O15B로 그야말로 올스타급이었다.
27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많은 것이 변했다. 강산이 거의 세 번 변한 시점이다. 타이틀곡을 만들고 행사를 진두지휘하다시피 한 넥스트의 리더 신해철은 몇 해 전 세상을 떴다. 그는 가수를 직접 설득해 행사에 참여시켰을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선배 가수를 제치고 행사 전력의 60~70% 이상을 차지하던 리더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한국 나이로 25세였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다. 새파랗게 젊었던 그가 어떻게 어떻게 내로라하는 슈퍼스타가 모인 군단을 이끌며 행사에 색채를 입히고 앨범 전체를 프로듀서했는지, 그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놀랄 뿐이다. 행사 당시 드럼을 쳤던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도 얼마 전 세상을 떴다. 지금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주 눈물을 흘리며 심사평을 하는 푸른하늘의 유영석은 당시 미성이 돋보이는 아이돌급 가수였다. 파릇파릇했던 이승환은 방부제를 먹은 듯 변하지 않은 얼굴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때와 지금 목소리와 추구하는 음악 방향은 많이 다르다. 김종서의 작열하는 샤우팅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지금같은 노련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의 머리색은 검었고, 신성우의 금빛 쫄바지는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후덕해진 중년이 된 지금과 달리 그는 당시 `테리우스`라 불리며 준수한 외모로 수많은 여성 팬을 끌어당기던 슈퍼스타였다. 신성우와 `테리우스` 자리를 놓고 싸우던 이덕진의 근황은 궁금하고, 서태지와아이들 출신의 양현석은 소속가수 문제로 최근 곤욕을 겪고 있다. 최근 요리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윤상은 그때 가장 주목받는 작곡가이자 천재 뮤지션이었다.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은 신승훈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은 세월의 흐름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 한 방송사가 생중계했던 이 행사는 엄청난 화제를 끌었다. 행사 주제가였던 `내일은 늦으리` 가사를 보면 이 가사가 어떻게 1992년에 나온 가사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생각해보면 힘들었던 지난 세월
앞만을 보며 숨차게 달려 여기에 왔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이제 여기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네
어린 시절엔 뛰놀던 정든 냇물은
회색 거품을 가득 싣고서 흘러가고
공장 굴뚝에 자욱한 연기 속에서
내일의 꿈이 흐린 하늘로 흩어지네
하늘 끝까지 뻗은 회색 빌딩숲
이것이 우리가 원한 전부인가
그 누구가 미래를 약속하는가
이젠 느껴야 하네
더 늦기 전에
그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두 눈 속에 담게 해주오
그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두 눈 속에 담게 해주오
(내레이션)
저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던 우리의 별들을
하나둘 헤아려 본 지가 얼마나 됐는가
그 별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힘없이 꺼져가는 작은 별 하나,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는 저 별마저 외면하고 떠나보내야만 하는가
결론만 놓고 보면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나간 가사다. 27년 전에는 지금보다 하늘에 별이 비교할 수 없었을 정도로 많았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저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던 우리의 별들을 하나둘 헤아려 본 지가 얼마나 됐는가`라고 가사는 말한다. 이제는 별을 보기 위해 아예 하늘을 쳐다볼 시도도 안 하는 세상이다. 27년 전 가사는 `하늘 끝까지 뻗은 회색 빌딩숲 이것이 우리가 원한 전부인가`며 울분을 토하지만 27년이 흐른 지금은 미세먼지 때문에 대낮에 길 너머 회색 빌딩숲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단순한 화제성 측면에서 떠나 이 무대에 올랐던 곡들은 음악성 측면에서도 훌륭하다. 이 당시 넥스트는 신해철, 정기송, 이동규의 3인조 라인업으로 테크노와 록, 일렉트로닉스 등 다양한 음악을 앨범에 녹여냈던 실험성 강한 밴드였다. 그들이 수록했던 `1999`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기 1999년 9월 10일
전기의 공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아마도 마지막 기록이 될 것 같다
혹 생존자가 이 기록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무책임이 낳은
이 비참한 결과를 후세에 전하기 바란다
중략
지금 시각은 오후 2시지만 하늘은 밤처럼 어둡다
산성비와 일사량의 감소로
식물들은 전멸의 길을 걷고 있다
몇 년째 태어난 신생아들은 거의 모두가 기형아였다
그나마 출산율조차 거의 제로를 향하고 있다
대기의 온도는 계속 상승 중이다
남극 대륙은 물로 변하고 해안의 도시들은
물에 잠겨 자취를 감추었다
후략
전형적인 세기말의 분위기를 담아 만든 가사다. 가사 몇 구절을 보면 작사가 신해철의 범상치 않은 예감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표면적인 이유는 다르지만 출산율은 정말 1 이하로 떨어졌고, 대기 온도는 계속 상승하고 있다. 남극 대륙의 빙하가 녹고 있다는 소식도 속속 들린다. 그는 이 괴기스러운 가사를 세련된 테크노에 잘 포장한 명곡을 만들어냈다.
이승환이 작사·작곡한 `봄의 미소`는 가수 생활 초반부의 `어린왕자` 이승환 스타일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고, 유영석(푸른하늘)이 부른 `우리가 설 이 땅`은 유영석의 맑은 미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전성기 그는 노래를 꽤 잘하는 가수였다. 심지어 아이돌 캐릭터였다). 김종서 이덕진 신성우 로커 3인방이 부른 `숨쉬고 싶어`는 가사를 보면 사실 지금 나왔어야 할 노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과 땅
모두가 숨을 쉬며 살아가야 하지
하지만 왜 이렇게 답답한 거야
가슴이 답답해서 참을 수 없어
하늘로 날아가는 저 검은 새들
하늘로 날아가면 숨을 쉴 수 있나
강물은 기름으로 덮여 있어서
고기들 숨이 막혀 죽어버렸어
거리에 쌓여가는 자동차들
안개를 닮아가는 아파트 빌딩숲
아이들 가슴속엔 그을린 꿈
나 이제 이 모든 걸 벗어나서 숨 쉬고 싶어
이외에도 신승훈, 서태지와아이들, 윤상 등 아티스트가 부른 솔로곡을 오랜만에 찾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린 시절 추억에 잠겨 27년 전 노래를 듣다보니, 지금이야말로 `2019년판 내일은 늦으리`가 다시 나와야 할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초기 행사를 이끌었던 신해철은 세상에 없지만 그보다 더 멋지게 행사를 이끌어 줄 아티스트가 분명 있을 것이다. `숨 쉬고 싶은` 국민들을 위해 `사이다`처럼 할 말 다하는 콘서트가 나오면 어떨까.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는 한국의 미세먼지 소식을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든다.
출처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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