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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그룹이야기

무한궤도 2편

by 수수네 하우스 지킴이 2020. 6. 3.

무대 위에서 몇번의 경험을 쌓고 나자 전맴버들은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표정에 '후까시'가 살벌하게 잡히기 시작한거다.
무대위에서 절대 웃지 않으며 마치 나 공연 오천번 해바써..싸인도 좀 해줘써..
머 이런 표정 이었는데, 사실 공연이 끝나면 다른 팀 순서에서 대기실에 안있고 공연히 공연장 입구를 왔다갔다 하면서 싸인해달라는 사람 없나..돌아 다니다가 그날밤 연습실에서 쿠하하…난 싸인 세장 해줬다..웃기지마..바부팅이야~!

난 다섯장 해줬다~!!! 하고 추태를 부리는게 당시 우리의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팀 한편에 어두운 그림자도 적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설정한 방향, 간단하게 말해서 여러 프로그래시브 밴드들과

팝이 겹치는 영역에서 우리가 활동할 공간은 오버에도 언더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레코드사 에게서는 꼴통 언더밴드 취급을 받았으며, 언더밴드들에게는 부르조아 학생밴드 취급을 받았고, 대학써클 밴드들에게는 잡탕 연합 서클 취급을 받았다.

당시는 발라드가 국내를 완전 평정 할 때여서, 앨범 한장을 사면 발라드 9곡에 구색용 빠른 노래 한곡이 들어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렇게 가던가..아니면 말도 안되는 영어로 올메탈 판을 하나 만들고

매우 비겁하게 보이는 우리말 발라드 (록빙가…'록' 발라드를 '빙'자한 완전'가'요)를 하나 싣던가…전자를 택하느냐..후자를 택하느냐…둘중에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에 따라 판을 오만장쯤 팔수 있는 꿈을 꾸던가..삼천장 팔고 만족하던가..

팔자가 정해지는 거였다..판 팔리는 장 수가 의미하는게 금전적인 수입이 아니라,

활동영역이라고 볼 때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우린, 제 3의 선택을 해버린다..라면집에서 튀김 라면을 때리던 중 한놈이

야..우리 대학가요제나 나가자..하고 말해버린 것이다.

모두 비웃는 투로 크게 냐하하하~~~~하고 웃은 후, 다꽝을 때렸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전 맴버가 대학생이질 않은가..참가자격이 되는 거였다.
사람들이 잘 이해 못하는 부분인데..우린 우리 스스로를 '대학생 밴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 당시 언더 씬에 있던 수백개 밴드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팀만 전 맴버가 우연히 대학생이라는 것을 빌미로 하여 대학가요제라는 권모술수로 상황을 타개하기가 참으로 쪽팔렸다..

어떡하겠니…살 놈은 살아야지…

1대 베이스 양두현이 음악해서 배고프게 살기 싫다고 일리노이 주립대로 떠나버리고,
(사실 그놈이 떠난건 딴 이유이지만..핸들 잡은놈이 짱이니..이제 복수 할란다..)
2대 베이스 조 형곤이 가입한지 얼마 안 되었을땐데 갑론을박을 거쳐서,
원서 접수 마감날 조 형곤이 원서를 내고 왔다.

웃긴 것은 절대 그런 웃기는 짜장 행사에 참가 할 수 없다던 강경파들도 마감 당일날엔 두 시간 늦었는데…원서 못 내는 거 아냐…어떡하지??? 했다는 거다.
(애들은 애들이다.)

원서 접수 번호를 보고 바짝 쫀 나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참가 곡을 쓰기 시작했다.

접수 번호가 내 기억으로 1800번대 였던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룹 참가자와 솔로 참가자를 다 합친 숫자이긴 했는데, 일차 예선에 나가보니 밴드 팀도 100팀 남짓 되었다.

당시 아버지의 검열을 피해서 기타를 뚱땅 거려야 했던 나는 "심야 작곡 셋트"를 갖고 있었는데..그게 뭐냐하면 기타 줄 사이에 스폰지를 끼어넣은 기타와 문방구에서 파는 멜로디언이었다.

그걸 갖고 이불을 뒤집어 쓴 후, 이불 속에서 헉헉 대며 숨을 물아 쉬며 곡을 쓰는 거다.

잠시 작업 하다 보면 이불 안에 습기가 차고, 머리가 어지러워 네 마디 이상을 연속으로 작업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아부지 한테 안 걸리고, 이것 저것 소리를 내 볼수 있는 것 만으로 대 만족이었는데, 우리가 상을 탄 후 무한 궤도는 심지어 자동 작곡 장치도 있으며
그대에게는 코치들이 써 줬다더라..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니…나…울까..웃을까..

무한궤도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 전에 고교떄 밴드 동료들이 만든 아기천사라는 팀의 긴급 요청으로 땜빵 맴버로 강변 가요제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노래가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였다.

라디오 중계에 나가는 본선 24팀 까지는 나가고 티비 중계에 나가는 12팀 결선에는 떨어졌는데, 솔직히 떨어진 이유를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수긍한다..)

해서…나름대로 '가요제'라는 것을 분석해 보았는데,

 

다음이 당시 나의 결론이다.

1. 대학 가요제나 강변 가요제는 방송국의 자체 축제의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듀서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던 밴드는 입상권 (당시는 무조건 발라드)의 노래보다는 행사 구색용의 쿵짝 쿵짝을 해줘야 된다.

2. 심사위원은 티비를 보면서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관객과 같이 있다. 그러므로, 관객들의 반응을 잡아내는 것이 결과 적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하는 지름길이며, 가장 정당한 방법이다.

3. 기성 곡이 아니라 신곡을, 다시 말해서 듣도 보도 못한 곡을 현장 관객, 심사 위원, 티비 관객 이 평생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번 들어보니 좋은 곡' 따위는 먹힐 이유가 없다. '한방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4. 어떤 노래든 1절쯤 들어보면 답이 나온다. 2절은 어차피 1절의 반복이다. 그렇다 해도 ' 예의상' 1절 2절의 반복구조는 있어야 된다.
그렇다면??…인트로와 아웃트로를 나 들어 왔어요.. 저 끝났어요…라는 식으로 쓰는게 아니라, 곡의 이미지를 전달 하는 독립곡으로 간주하고 화려하게 발리는 거다. 특히, 일회성의 행사를 눈 지긋이 감고 두시간동안 인내심있게 아마추어들의 장기자랑을 들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작 하는 순간 튀어야 하는 거다.

5. 코드와 리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패턴으로… 단지 어레인지 먼트를 국내 밴드 족보나 가요 족보에 전혀 없는 팝 록 밴드 풍으로 복잡하게 벌린다.

6. 이상의 아이디어를 수줍은 아마추어처럼 연주 하면서 동정표를 따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고, 무엇보다 우리체질에 맞지 않는다. 노련한 표정으로 노래가 삑사리가 나도 눈에 힘을주며, 박자가 가도 태연해야 한다.('태연' 보다 '의연'이 어울리겠다.)

7.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잔대가리 수준을 넘어 거의 야비 수준에 이르는데…하는수 없다. 이 게 리더의 역할이다. 대학 가요제에서 초창기 구도는 대상-그룹 금상-듀엣에서 대상-듀엣 혹은 솔로 금상-밴드의 구도 였다가, 중기 이후는 대상, 금상-아무나 동상-참가 밴드중 제일 난 놈 이라는 구도로 정착되었다. 고로, 일단 라이벌 밴드들을 모두 격파한 후 최소 금상을 탈환해 온다.(회의 할 때 최소 금상 이라고 얘기 했다가 애들이 무지 구박했다. 꿈 깨고 동상 이라도 건지자고…대상 소리 꺼낸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여기 까지 굴린 후 인트로서부터 후주까지 10분쯤 걸려서 이불 속에서 헉헉 대며 곡을 썼다. 이리하여, 88년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공연에서 우려 먹고 있는 "그대에게"가 탄생했다. 사람들이 공연장에서 이 노래의 인트로가 나오는 순간 까무라치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난 아직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쩄든, 졸라 좋아해주니 고맙긴 고맙다….

벼락치기 연습과 마구리 가사 쓰기로 1차 예선에 나가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정동 MBC에 모여 있는 '그룹사운드'들은 당시 우리나라 밴드들의 종류별 콜렉션 같았다.
주력인 대학 서클들 외에도 당시 사람들이 경악하는 패션-울트라 장발, 가죽잠바,가죽팔찌(쇠찡 박힌…), 카우보이 부츠-로 무장한 메탈 밴드도 있었고, 자주색 기지바지(당연히 배바지), 깃또 와이셔츠, 도끼빗, 닭대가리 파마의 펑크풍 밴드도 있었으며, 서울대에서 왔다는 괴상한 3인조는 째즈도 아닌 가요도 아닌 골 때리는 곡을 연주했는데 밴드 이름이 실험실이었으며, 바벨2세 에 나오는 요미와 흡사한 키보디스트가 피아노 연주로 관객들을 으악 죽이고 있었다.(그의 이름은 정석원 이었다..훗날 그의 별명은 요미가 된다…)

밴드들은 서로 살벌한 시선을 교환하며 한팀 한팀 연주를 했고 우린 사실 별로 긴장하진 않았다. 수천명의 관객이 모이는 진짜 공연에서 무려 '오프닝 밴드'씩이나 해본 것은 우리 밖에 없을거야..라고 생각한거다. 게다가 우린, 뺑이 치고 단독 공연도 했었으니까…무대 경험이 그렇게 중요 한지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인상 깊었던 출전자 들로는 강강수월래를 부른 밴드가 있었는데, 보컬 리스트가 '널뛰기' 모션을 하며 안무까지 곁들인 초강력 팀이어따…(무려 3차예선까지 올라왔었다.) 완전 뽕짝을 연주한 팀도 있었는데 음악이 문제가 아니라 얼굴이 완전 40대여서 출전자들이 "여기 대학가요제 마자여??" 하고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1절이나마 끝까지 연주한 팀은 우리를 포함 2-3팀에 불과했고, 심한 경우에는 네마디 만에 땡 하고 벨이 울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특히, 반 사회적인 아웃룩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두마디 만에 벨이 울리기도…

연주를 시작할때는 학교 이름, 팀 이름, 곡 제목을 싱어가 소개하고 연주를 시작하는데 "서울대, 연대, 서강대 연합 무한궤도 입니다.." 하는 순간 관객석이 웅성웅성 하는게 아닌가.. 졸라 쪽 팔렸다. 점수 좀 높은 학교 다니는게 도대체 음악하고 무슨 상관인지..그렇다고 학교 이름은 밝힐 수 없구여…하는 수도 없어서 2차 예선서 부터는 "서강대, 연대, 서울대…" 순으로 얘기 했다.(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쓴 웃음이 나는 기억이다. 어른들이 명문대..명문대 하는 이유가 있긴 있구나…하지만 왜 음악 필드에 까지…
3차 예선을 통과 하자, 팀 분위기가 골때리게 되어버렸다. 당시 우리는 1,2,3차 예선을 우리가 모두 1등으로 통과 했을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근거로 목표를 동상에서 은상으로 대거 수정 하는 등..들뜨기 시작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중고생 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수입을 얻고 있었는데(말하자면, 불법과외)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쌤플링 키보드를 살 돈은 턱 없이 모자랐다.
우리 아버지의 10남매나 되는 친척 중 유일하게 약간의 한량 기질이 있다고 인정되는 작은 아버지에게 고민 상담차 머리칼 나고 처음으로 찾아 갔는데, 의외로 흔쾌히 턱이 빠질 정도의 거금인 당시 돈 100만원을 마련해 주셨다.
이게 내 평생 음악하면서 내 힘 아닌 다른 사람의 돈을 받은 유일한 케이스다.(아직도 안 갚았다.) 해서, 조현문이 갖고 있는 주노60과 디엑스 7(친척집에 있던 것을 어찌 어찌 하여 장기 임대라는 명목으로 쎄벼왔다.) 김재홍이 갖고 있던 롤랜드 디50 (대학 들어가면 키보드 사 주실거죠?? 라고 중1떄부터 졸랐다고 한다.) 에다가 내 아카이 엑스7000이 합쳐져 스테이지 위에는 무려 4대의 키보드가 올라가게 되었다.

물론 당일날 출전하는 다른 밴드들도 우리와 같은 등급의 악기를 사용했지만, 그건 당일 날 악기 사에서 대여한 것 이고 우리는 우리소유의 키보드가 있었기 때문에 차이는 활용도에서 나는 것이었다.
모든 키보드는 스플리트 모드로 왼손 오른손이 다른 소리를 내도록 셋업되어 있었고, 내 키보드에서는 동시에 5개의 틀린 소리를 지원하도록 설정해 놓았다.
우승 후에 무한궤도는 억대의 장비를 쓴다는 소리가 나돌았는데 억대는 아니고 그저 몇 백만원급의 '두뇌'를 사용했다. (음악하는 놈 중에 장비 탓 하는 놈 치고 발로 뛰면서 장비 구하려고 뺑이 치는 놈은 여지껏 못 봤다. 다른 놈이 갖고 있는 장비는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아나보다.)

결선에 진출하게 되자, 우리는 담당 프로듀서에게 따로 불려가 밀실에서 잠시 대화를 가졌다. 이 사건은 출전자들이 약간의 의심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게 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내용인 즉슨 그 전해, 말하자면 87년에 6.29선언 이후 대학가요제가 열리게 되자 결선 참가자들이 단합하여 합동 뮤지컬 공연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 보복으로 MBC는 행사 자체를 축소하여 버렸는데, 올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경우 그 주모자는 틀림없이 무한궤도 일 것이라고 지목 되어, 쉽게 말해 개기면 너네 죽어~! 라는 다짐을 받고 나왔던 것이다.

사실 궤도 맴버중 짱돌이라도 한 번 던졌던 사람은 나 밖에 없었는데, 다시 강조 하자면 리더인 책임 때문에 나….엄청 착한 표정 하고 있었다..(그런 착한 표정하지 말아요~~~ㅠ.ㅠ)

여담이지만 이승철 선배도 강변 가요제에 나갔었는데, 밀실로 불려가 너 대가리 털만 깎고 오면 생각 좀 해보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울트라 양아치 장발을 범생이 머리로 자르고 갔더니… 그래도 떨어뜨리더래..

운명의 12월24일, 대학가요제가 사상 최초로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열리던 그해…그해 겨울은 졸라 추웠다. 왜냐믄, 방송에 나갈 인서트 화면을 찍는다고 눈밭에서 굴리질 않나..썩은 미소 띄우며 나뭇가지 붙들고 재롱을 떨라고 하질 않나..사실 우리는 첫 공연 이후에 틴에이저 잡지에 취재 요청 엽서가 많이 와서 인터뷰를 몇번 해 봤는데,

인간 피라미드 쌓기, 풀밭 뒹굴며 화사하게 웃기 등을 요구 하는 바람에 골 때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급기야 12월23일 밤, 맴버 전원이 고열과 복통, 설사,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눈 앞이 캄캄 했는데 그래도 다행인건, 씨파..나 안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같이 손잡고 울면서 우짜 됐던동 show must go on이다 하고 다짐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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