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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그룹이야기

무한궤도 4편

by 수수네 하우스 지킴이 2020. 6. 3.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보내고 멤버들은 현찬의 집 지하실에 다시 모였다.

전원 탈진에다 쾡하니 맛이 간 얼굴, 꿈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골 때리는 상태에서 우린 그냥 얼굴을 마주 보며 낄낄 댔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회의에서 팀의 방향은 이제 명확히 결정되었다.

원래는, 대학가요제를 마지막으로 나를 제외한 멤버들은 음악을 그만두기로 했던 것인데, 언감생심이라고 그랑프리를 탄 이상 아마도 앨범을 제작하는데 무리 없는 상황이 될 것이고, 최소한 밴드를 만든 이상 앨범을 하나 남겨야 하지 않겠냐..하는 것이 중론이었다.

나 역시 고생고생 해온 멤버들과 어떻게든 레코드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대학 가요제 보다 우선하는 목표였고 당연히 뛸 듯이 기뻤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프로페셔널로 또 전업 작가로의 길을 배제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밴드인 이상 언젠가는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라는 것이 당연히 피할 수 없는 길이기는 하지만, 언제 뛰어들어도 뛰어들어야 할 그 삭막한 쇼 비즈니스의 세계보다는 그저 즐거운 친구들과 같이 밴드를 하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자 즐거움 이었다.

레코드사를 선정하고 매니저를 선택하는 일은 리더인 나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쇼 비즈니스’ 개시 하루 만에 상황은 우리의 상상과 백팔십도 틀림이 밝혀졌다.
대학 가요제 출전당시 우리를 목격하고 제작자가 되어 주겠다..라는 의사를 밝힌 사람은 무려 삼사십 군데가 넘었다.

그들은 어찌 어찌하여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기도 하고, 방송국 프로듀서를 통해서 연락을 해오기도 했는데 커피숍 같은 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진행 상황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호텔 커피숍(그들이 지정한, 나로서는 평생 처음 가보는,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는 한복을 입은 아줌마와 정장을 차려 입은 남녀들이 맞선을 보고 있는 괴상한 장소)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뛸 듯이 반겨 맞으며 십 년 된 지기인양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대게 첫마디가 “저런…스타가 버스를…안 될 말이지. 너 차가 있어야겠구나.….

네가 좋아하는 기종이 뭐니?” 뭐 이런 허파에 바람 넣기 성 멘트다.

물론 나야 뭐 기타니 신디사이저니 이런 물건들을 들고 버스 운전사 양반들의 온갖 박해와 박대를 받으며 다닌 지 오래 이니 솔직히 말해서 귀가 솔깃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라고 불어야 겠다.

그르나…그르나 말이쥐 다음 멘트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확 깬다.

“C피디한테 얘기 들었는데…너 솔로 할 거라면서…P씨도 그렇게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눈을 꿈벅 꿈벅 하면서 이게 웬 문지방에 좆 낑 기는 소리인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아뇨오오오~~~ 전 밴드 할 건데요오오오~~~” 하고 대답하면, 그래 더 필요한 악기는 없니, 음악 방향은 어디로 갈거니, 밤무대가 수입이 살벌한 건 알고 있지,

내가 CF계에 아는 사람이 오방 많아..하고 날라 다니던 그 많은 멘트들이 전부 쏘옥 들어가고 침묵만이 흐른다.
그리고는 설득의 멘트가 몇 개 더 나오는데 종류별로 나열하자면, 첫째는 너는 아직 뭘 몰라 형 둘째는 나도 예전에 그거 해 봤는데 그거 답 안 나와 형 셋째는 언제 보따리 싸도 쌀 건데 미련 버려 형 등등등...

대학 가요제 출전 당시에도 그렇고 레코드사를 찾아 헤매던 당시에도, 내가 넥스트를 만들던 무렵에도, 그리고 현재 까지도 밴드가 찬밥을 먹는 것은 민간인의 상상을 초월 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솔로 싱어로 나설 거라는 것을 전제로 계약서를 들이밀었고 나로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속으로 곧 니 놈들은 땅을 치게 될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는 수밖에.

완강하게 몇 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 그들은 곧 참, 선약이 있는데 잊어버렸네.…혹은 오 그래 그러면 내가 검토해보고 다시 전화하지…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며, 나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대학가요제가 끝나고 한 달간은 골 때리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주관 방송사인 MBC의 티비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몇 개 출현 했으며, 특히 잡지사 등에는 우리와의 취재를 요청하는 엽서가 쇄도해 상당히 많은 분량의 인터뷰를 소화해 내야 했다.

그것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은 재미도 없지 않았으나, 곧 짜증과 염증으로 바뀌었고 여전히 제작자들은 솔로 싱어라는 형태 이외에는 전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는 첫 앨범을 세상에 내 놓지 못한 채, 그저 대학 가요제의 우승자로 매스컴에 잠깐 얼굴을 비추고 그것을 추억이랍시고 회상해야 될 처지가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첫 라디오 출현을 했던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흘쯤 뒤일 것이다.)

디제이를 교체해야겠는데, 혹시 디제이 할 생각 있냐는 거다.

나는 친구들과 전화를 한 통씩 때려 본 후 바로 예스 해 버렸다.

첫째는 공동 진행자가 미스 코리아 장윤정이고 둘째는 디제이는 내가 밴드 다음으로 좋아하는 일이었으며 셋째는 레코드 계약이 개판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감 등등이었다.

프로그램 이름이 “하나 둘 셋 우리는 하이틴” 이라는 게 유일한 걸림돌이요, 하기 싫은 요인 이었지만…

지지 부진하게 몇 달을 끄는 동안 오랜만에 방송국에 행차한 조용필 선배가 라디오 국으로 사람을 보내 나를 찾았다.

자신이 심사위원장으로서 뽑은 꼬마 녀석을 얼굴이나 한번 보려는 거였는데, 매니저도 없이 빌빌대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예전 매니저였던 유 재학 씨를 추천해 주었다.

그는 나도 이름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전설의 매니저 등급 중 한 사람으로 조용필의 매니저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었다.

유재학씨는 다른 매니저들과는 달리 밴드를 유지 하며 첫 앨범을 내겠다는 계획에 어떠한 반대도 표시 하지 않았다.

단지, 밴드가 해산 할 경우 계약 기간의 나머지를 내가 솔로로 이행해야 하며 그 기간은 5년임을 내세웠는데, 멤버들 사이에 논란의 소지가 될 부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당시의 음악 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그나마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그리고 불과 얼마 후, 우리는 첫 앨범의 녹음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나의 미래는 장미 빛이었다. 밴드랍시고 계속 까불다가는 얼마 안되어 좆 될 거라는 주위 경고는 귓등으로 넘겨 버렸고, 밴드 멤버들은 첫 레코딩으로 인해 모두 익사이팅 했으며, 나는 라디오 디제이 수입으로 사십 팔개월 할부 소형차를 하나 사고 면허를 땄다.
(그리고 삼 개월 내로 앞 범퍼, 뒷 범퍼, 앞 문짝 두개, 뒷 문짝 한 개, 풀랜더 두개를 각각 다른 접촉 사고로 바꾸었다. 그래도 어쨌든 난 행복했다.)

소속사와 제작자의 문제는 해결했고 또 한 가지 문제는 팀 전력의 강화 문제였는데, 우리는 트윈 키보드 시스템으로도 모자라 한명의 키보디스트를 더 영입하여 무려 세 명의 키보디스트가 있는 밴드로 방향을 정하고 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세 명의 키보드라는 골 때리는 시스템에 대해 반대 의견도 없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레너드 스키너드는 쓰리기타로도 하던데…” 라고 말함으로서 회의가 끝나버렸다.

제 삼의 키보디스트…그가 정석원이다.

이번에는 호텔 커피숍이 아니고 그냥 다방이었다.

(당연하지) 그는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 유학을 와 있는 셈이었으므로,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자취방은 나에게도 또한 아지트가 되었다.

그가 합류함으로서 무한궤도에 대중적인 성격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는 우리나이 또래에서 드물게 코드 변환, 전조, 텐션 변화에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배킹형 키보디스트로, 견고한 팀플레이에 주력하는 현문이나 리드 플레이를 주로 맡는 재홍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의 키보디스트였다.

게다가 당시 그의 캐릭터는 사투리가 섞인 코믹 캐릭터로 훗날의 공일 오비 때와는 사뭇 이미지가 다르며, 밴드가 해산할 때까지는 멤버들과도 매우 잘 융합했다.

자, 이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녹음에 들어간 무한궤도의 첫 앨범, 우리는 과연 무슨 짓을 했던가…

그 참상을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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